글 김지용
왜 셰익스피어가 위대한가?
르네상스 이후로 연극은 많은 극작가를 배출해내었다. 꼭 셰익스피어가 아니더라도
르네상스부터 신고전주의 시대에 등장한 대표적인 극작가로는 크리스토퍼 말로우
(Christopher Marlowe:1564-1593), 벤 존슨(Ben Jonson:1572-1637), 피에르 코르네
유(Pierre Corneille:1606-1684), 몰리에르(Moliere:1622-1673), 장 라신(Jean Baptiste
Racine:1639-1699) 등 여럿이 있다. 그런데 모두 셰익스피어만큼 추앙받거나 그의 작품
만큼 자주 상연되지는 못한다.
뛰어난 시적 상상력, 인간성의 안팎을 넓고 깊게 꿰뚫어보는 통찰력, 놀랄 만큼 풍부한
언어의 구사, 아주 다양한 무대형상화 솜씨 등 셰익스피어를 수식하는 문장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연극의 아버지처럼 된 데에는 이러한 특별함이 작용해
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제의식 및 창조된 인물의 보편성에 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벤
존슨은 셰익스피어를 일러 “한 시대가 아닌 만세를 위한 작가”라 말했다. 시대가 바뀌고
장소가 바뀌어도 사람이 추구하는 보편적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는 이러한 보편성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이렇듯 자
주 공연되어지는 것이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되게 친숙한 지점들이 많다. 그 시대
에는 서로 왕래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우리의 설화나 민담들과 이렇게 닮아있
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결국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이야기의 원형성을 담
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국의 신화가 서로 닮은 것처럼 셰익스피어가 풀어내는 이
야기 역시 인간이라면 한번쯤 상상해냄직한 것들로, 시공간을 초월해 친숙함을 불러일
으키는 것이다.
작품세계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은 상연 연대에 따라 대개 4기로 분류된다. 하지만 각 시기를 특
징짓는 성격은 명확하게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차하며 맞물려 있어 대략적으로
만 구분할 수 있을 뿐 정확하게 나눠지지는 않는다.
제1기는 습작기로 분류되며 주로 사극과 경쾌하고 가벼운 낭만희극을 썼다. 셰익스피어
의 데뷔작으로 추정되는 사극 헨리 6세(Henry VI) 3부작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뒤로 실수연발(The Comedie of Errors), 사랑의 헛수고(Love's Labour's Lost) 등과
같은 가볍고 밝은 경쾌한 낭만희극을 연속으로 집필하였다.
크리스토퍼 말로우(Christopher Marlowe:1564-1593)나 토마스 키드(Thomas Kyd:
1558-1594) 등 당대의 선배 극작가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이 시기는 셰익스피어 본
인에게 있어 자신의 정체성과 극작 스타일을 모색하는 기간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은 초기 낭만비극의 걸작이며,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과 더불어 습작기를 마감하는 방점으로 작용한다. 이 두
작품은 내용과 그 구조상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으나, 로미오와 줄리엣은 초반엔 희극
적 특성을 보이다 3막 이후로 비극성이 짙어져 죽음에 이르는 반면 한여름 밤의 꿈은 결
혼으로 이어지는 축제로 종결된다.
성장기에 해당하는 제2기는 희극의 세계가 더욱 확대되었다.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 십이야(Twelfth Night), 베
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 등의 희극들을 잇달아 발표했고, 사극으로는 헨
리 4세(Henry Ⅳ) 2부작과 로마를 배경으로 한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가 상연되
었다. 극작술의 진보가 이루어졌고, 비극과 희극을 잘 융합시키는 셰익스피어만의 재능
이 만개하여 독보적인 인기작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줄리어스 시저의 경우 역사적 사실
을 근거로 하나 셰익스피어에 의해 새롭게 창작된 경우이다. 유명한 대사인 “브루투스 너
마저도.” 같은 대사는 셰익스피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브루투스가 시저의 양아들이
라는 설정 또한 실제 역사가 아닌 셰익스피어만의 것이다.
초창기에서 중반기에 이르는 동안에 셰익스피어는 역사극을 비롯하여 희극을 주로 썼
다. 이것은 극단의 생존과 직결되는 지점으로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귀족들과 왕실의 후
원이 있었겠지만 셰익스피어 당대의 연극 풍토 자체가 무엇보다도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는 예라 볼 수 있겠다. 그러다가 희극 십이야
(Twelfth Night) 이후로 다양한 레퍼토리를 확보하여, 극단의 경영이 어느 정도 안정적
인 궤도에 오르자 비극의 세계에 집중하고 있다.
제3기는 원숙기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셰익스피어의 희극성은 슬슬 자취를
감추고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의 비극이 주로 만들어진다. 우리가 기억하는 셰익스피어
의 4대 비극, 햄릿(Hamlet), 오델로(Othello), 맥베드(The Tragedy of Macbeth), 리어
왕(King Lear)은 모두 이 시기에 창작된 것이다. 또한 코리올라누스(Coriolanus), 안토
니와 클레오파트라(Antony and Cleopatra) 등 줄리어스 시저의 뒤를 잇는 로마 비극들
도 집중적으로 창작되었다. 이들 비극은 인생에의 깊이 있는 통찰을 이룩하였고, 걸출하
고 개성적 인물을 창출했으며, 주제적으로는 정의와 불의, 사랑과 신뢰, 진실과 존재, 선
악과 양심의 문제를 심도 있게 조명함으로써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세계문학사에서 불후
의 명성을 누리는 최고의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제4기에는 희비극으로 불리는 로맨스 희곡의 창작이 주류를 이룬다. 말년의 걸작 템페
스트(The Tempest)는 생애의 끝에서 삶을 관조하는 넓고도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희
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극적 세계관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해피엔딩을 추
구하며, 이는 셰익스피어의 세상에 대한 의지로도 읽혀진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세계는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와 그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해
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의 기틀을 다진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는 사회 전반에 걸쳐 진취적
이고도 실험적인 기운이 용솟음치던 시기였고, 르네상스의 의지가 가득 찬 시기였다. 셰
익스피어는 여태까지의 연극이 행해오던 관습에 굳이 얽매이지 않았고, 희극과 비극을
융합해내는 자기만의 재능을 유감없이 뽐내었으며, 풍부한 상상력과 정교한 극작술로써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대륙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았던 영국의 정치적 환경과
사회적 분위기 또한 셰익스피어를 도와준 요소이기도 하다.
연극의 아버지
언어, 문화의 차이와 번역 상의 선택으로 인해 우리는 사실상 셰익스피어가 구사하는 대
사와 그 속에 담겨있는 멋진 비유의 참다운 맛을 느끼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장벽을 초월하는 보편적 주제와 극구성의 완결성은 셰익스피어를 연극의 아버지라 칭해
도 모자람이 없게 만든다.
또한 셰익스피어는 어떤 작품이든지 유머러스함을 놓치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않고 극을 재미있게 만든다.
햄릿의 비극적인 여주인공 오필리어를 한 번 분석해보자. 보통은 아름다운 여자가 연인
의 배신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미쳐가는 안타까운 장면을 상상할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엔 여자의 신분으로는 무대에 오를 수 없었다. 남자배우가 여장을 하거나 가면을 쓴 채
여자 역을 연기했다. 다시 장면으로 돌아가 본다. 햄릿은 오필리어에게 수녀원이나 가
라고 호통을 친다. 여러분은 그 장면을 보고 훌쩍거리며 비통해 할 것인가, 아니면 배꼽
을 잡고 웃을 것인가.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고는 굉장히 진지하게 파악하려 하
지만 정작 셰익스피어 본인은 당대의 가장 대중적인, 그래서 압도적인 흥행을 일으킨 인
기작가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위트와 특징을 읽어낼 줄 모르는 연출가
와 배우는 그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너무나도 고상하게만 이해하려 든다. 그리하
여 문학적으로 번역된 텍스트만 붙잡고는 셰익스피어 극을 재미없고 지루한 비극(非劇)
으로 만들고 만다.
김지용
부산 출생의 부산 대표 연출가이자 극작가.
극단<프로젝트팀 이틀>의 대표이자 현 부산시립극단 예술감독.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 부산연극제 3회 수상, 전국연극제 수상 등
수많은 상을 받고 수많은 작품을 쓰고 연출했다. 희곡집 <그 섬에서의 생존 방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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